여기서 한 KAIST 졸업생이 쓴 글을 살펴보자. 경험을 가진 멘토의 얘기가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데 매우 도움을 준 경우이다. 이 글을 쓴 이도 다른 후배들에게 훌륭한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주변에서 그 때가 좋았었지 라는 회상과 추억이 섞인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위노나 라이더의 "비틀쥬스"의 한 장면.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
숙제와 실험으로 바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갓 시작한 직장인들은 "학생때가 좋았었지"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현장이나 사업부로 옮겨 일하는 사람들은 "연구소 시절이 좋았었지"
어린 아이들을 키우느라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한 노부부들은 "걔네들이 아장 아장 기어다닐 때가 좋았었지"
그런 푸념 섞인 얘기를 대학생, 연구소의 연구원, 맞벌이의 초보 엄마, 아빠들에게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 때랑 지금이랑 같은 시절이 아니라며 남 사정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과거가 더 좋았다고 탄식조로 얘기하는 사람들의 핵심이 뭘까?
바로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현장이나 사업부로 옮긴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운좋게 피하게 되어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 본 "수상한 고객들"이라는 영화는 행복은 다른 사람이나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이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당신은 그래도 다행이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해준다.
Dan Ariely는 상식밖의 경제학에서 처형 남편보다 월급을 많이 받으면 통계적으로 행복 지수가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주변 학부형들에게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학부형 모임에 가서 변호사, 의사, 사업가 학부형들과 초라한 자신과 비교하다보니 떳떳하질 못하게 되고 괜히 주눅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
이러한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정신 수련을 해도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을까? 행복하게 살려면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자꾸 보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행복한 거야" 라고 상대적인 행복을 다짐해야 하는 것일까?
과거의 철학자들도 그러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최근 "철학 콘서트"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학생때는 매우 재미없게 배웠던 내용이지만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매우 재미있고 현재 나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준다.
행복을 자신 만의 절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고리타분한 공자와 같은 철학자에게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지 모른다. 공자는 군자(君子)를 가장 이상형의 인간으로 생각했다. 군자의 즐거움은 첫째는 학습, 둘째는 친구를 만나느 것, 셋째는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 이라고 했다. 나이 사십이 되면 세속의 유혹을 떨칠 수 있다고 하니, 이제서야 조금 이해를 하는 것을 봐서 정말 불혹(不惑)이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