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날 애들이랑 같이 토이스토리 3탄을 보러갔다.
토이스토리 3탄은 1, 2탄과는
달리 감동코드를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다.
거의 끝날때쯤 되어서, 토이들이 쓰레기 소각장의 시뻘건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다 죽게 생겼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토이들이 모두 손을 맞잡고, 우린 함께 있으니까 괜찮아! 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실제로 죽지는 않음. 친구 토이들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우린 함께 있잖아! 라는 메쎄지는
3탄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전달하려고 하는 주제이다.
이 장면에서 토이들에게 완전 감정이입된 나.
시뻘건 불길은 무섭지만, 사랑하는 토이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무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음을 느낀다. 이때 나의 심리상태는 토이들과
완벽히 혼연일체 상태임.
한줄기 눈물도 찔끔 나고….
나중에 비됴로 봐도 역시 찔끔 눈물 난다.
어쨌든.. 토이스토리 3탄을
보고서 느낀 것.
편안한 삶이 행복한 삶일지 모른단 나의 가설은 틀렸구나.
죽음을 앞에 두고도 행복할 수도 있는 거구나.
지구 온난화나 석유고갈 사태 같은거.
내가 고민해봤자 해결되지도 않는 문제들.
이런것들이 행복을 저해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은 아니로구나.
토이스토리 3탄을 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지구 온난화 사태에서 우리 애들을 어떻게 지킬까. 하는 고민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몇 년동안 지고 다니던 짐을 벗어놓은듯 홀가분했다.
그러다가, 초딩때 읽었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톨스토이 단편이 생각났다.
초딩때도 매우 감동하며 읽었었는데, 그걸 다시 읽었다.
천사 미하일이 잘못을 하고 땅으로 뚝 떨어져서
구두장이 집에 7년을 머물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3가지를 찾아내어 깨닫고는 하늘로 올라가는데,
결국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이야기.
사람은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편안한 상태여야만 살수 있는게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살수 있다는군.
특히 마지막 3번째로 미하일에게 깨달음을 준 장면이 그렇다.
쌍둥이를 낳고 엄마가 죽었으나, 이웃 여인의 사랑으로 엄마 없는 쌍둥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걸 보고서 미하일은 마지막 깨달음을 얻고 하늘로 올라간다.
인생이 편안할 만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쌍둥이인데도, 사랑이
있어서 잘 자랄수 있었다는 것. 흠..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엔
그랬다… 더 심오하게 캣치해야 할 무엇이 있었다 해도 난 모른다… 내
수준은 여기까지…
토이스토리 3탄과 왠지 통하지 않나?
내가 애들을 아무리 지켜주려고 한들 내힘으로 안되는 것들이 있을 뿐더러,
내가 지켜주려는 것들 (편안한 삶 같은 것들)이 실은 애들의 행복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손자의 손자와 그 손자의 손자까지… 이 많은 애들을 어떻게 편안하게
지켜주나 몇 년간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했었는데,
토이스토리 3탄과 더불어 톨스토이 아저씨가 한방에 해결해 주셨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소냐.
이제 내 자식과 grand children 들의 편안한 삶 까지는
걱정 안해도 되고,
다시 본연의 질문으로 돌아갈수 있게 되었다.
행복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떠할 때 행복한가?